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나라의 베트남 원정 (문단 편집) === 원나라의 점성국 정벌과 개전 === 원나라는 1284년 7월 21일 자신의 9번째 아들인 토곤(脫歡)을 진남왕(鎮南王) 겸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남송#s-4.1|양양(襄陽) 전투]] 당시 우량카타이의 아들 아유 밑에서 활약했던 장수 쉬게튀(唆都)를 20만 대군과 함께 보내 광동(廣東)에서 출발, 곧바로 [[참파|점성(占城)]]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다이 비엣은 점성(참파)을 돕기 위해 군대 중 일부와 함선을 보내기도 했다. 쉬게튀는 점성의 수도 도반(阇槃) 인근 해안에 상륙했고 도반을 둘러싸고 있는 목조 성채들을 공략하기 위해 군대를 셋으로 쪼개 북, 남, 동쪽에서 한꺼번에 들이쳤다. 결국 성채는 점거되었고 국왕이었던 인드라바르만 5세가 쉬게튀에게 항복을 위한 협상을 하자고 제안하자 협상에 응했으나 괜히 시간끌기만 당했다. 그 사이에 인드라바르만과 점성의 병사들은 깊은 숲으로 들어가 저항을 이어나가게 된다. 이 점성국 정벌은 사실 다이 비엣을 정복하기 위한 포석으로 점성을 점거함으로서 원나라 군은 다이 비엣의 북쪽과 남쪽을 포위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한 셈이었다. 점성국이 대략 정리되자, 진남왕 토곤은 위구르 족 출신의 '아리크 콰야'를 부사령관 겸 안남의 부왕(副王)으로 임명한 뒤 본격적으로 원정군을 다이 비엣으로 이동시켰다. 원나라 군의 장군들을 보면 [[서하]] 출신의 이항(李恒), 우즈벡 출신의 콘칵, 볼콰다, 사타르타이, 망쿠다이, 나콰이 등의 장수들과 한인 출신의 이방헌, 손우, 손덕림, 유세영, 유규, 의윤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거기다 이번 정벌을 위해 3만 석의 군량미까지 준비해 둔 상태였으며 유능한 의원이던 추경(鄒庚)이 통솔하는 의무 부대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워낙 큰 규모에 물자가 많이 들었기 때문에 다이 비엣 주변의 원나라 점령지들은 과도한 세금과 물자부족, 병력 제공으로 인한 인원 부족에 시달려야 했고 결국 각지의 지방관들이 남벌을 중지해 달라고 애원하기까지 했다. 원의 상서(尚書)였던 유선은 다이 비엣과 잘 협상해서 전쟁이 일으키지 않는 게 좋다는 주청을 할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 하지만 쿠빌라이의 남벌 의지는 확고했고 쩐 왕조의 조정을 향해 "우리 군을 지원하기 위해 특산물인 [[설탕]]과 식량을 바치라" 고 지시했다. 이 물자가 어디에 쓰일 건지를 뻔히 알고 있던 쩐 조정에서는 당연히 핑계를 대며 거절했다. 한편 쩐 조정이라고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1282년 11월 말, 강을 수비하던 레 엉위(梁 蔚)가 급히 전한 소식에는 원의 우승상(右丞相)인 타차이르가 남쪽의 다른 곳을 정벌한다는 이유로 50만의 병사를 이끌고 길을 빌리려고 하나 그것은 거짓말이고 실제로는 다이 비엣을 침공하려는 속셈이라는 언급이 들어 있었다. 쩐 황실에서는 수도 탕롱의 건홍전(延紅殿)에서 대비를 위한 회의를 열기로 했으나 각지의 왕과 귀족들이 참석을 거부했다. 이에 1285년 12월 태상황 쩐 성종은 수도 탕롱의 건홍전에 각지를 대표하는 노인들을 모은 뒤 "우리가 응우옌(원)의 침공에 저항하겠는가?" 라고 물었다. 그러자 모두가 하나되어 "싸우자!"를 외치면서 회의가 끝이 났다. 쩐 왕조 최초의 민주적인 회의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이 분위기에 이기지 못한 각 지역의 왕과 귀족들은 지원군을 보내기 시작했고 원의 눈을 피해 몰래 승려로 변장한 뒤 탕롱으로 들어온 흥도왕(興道王) 쩐 구옥뚜안은 왕과 귀족들이 각지에서 보내온 병력들을 부지런히 훈련시켰다. 그리고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병사들의 몸에 몽골인을 죽이자는 의미의 '살달(殺韃/삿탓)'이라는 문신을 새기게 했다. 그리고 모든 군과 국민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하달했다. >'''외부의 적이 몰려오면 국내의 모든 군인과 백성들은 목숨을 걸고 적을 타격하고, 적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산 속에 숨은 뒤 절대 투항해서는 안 된다.''' 쩐 조정에서는 마침내 쩐 구옥뚜안을 국공(國公)에 임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칭호를 함께 하사했다. >'''「절제하여 천하의 여러 군을 통솔하며(節制統領天下諸軍), 군관을 택하고 장수를 통솔할 권리를 가진다(擇軍校有將才者分統部伍).」''' 쩐 구옥뚜안은 이로써 전 다이 비엣의 군 통솔자가 되었다. 다이 비엣의 군대는 낭산(諒山) 일대로 이동했고 쩐 구옥 두안의 본영은 노이방(內龐)에 있었다. 쩐 구옥뚜안은 1차 침입 때 효과를 봤던 작전, 즉 원나라 군대를 보면 후퇴하면서 식량을 파묻거나 불태운 뒤 일대를 텅 비워 적을 지치게 만드는 청야작전을 채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